<힐빌리의 노래>와 방탄소년단 RM에 대해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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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11

<힐빌리의 노래>와 방탄소년단 RM에 대해

<힐빌리의 노래>에 대한 리뷰와 방탄소년단 RM, 김남준의 미술 사랑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소개한다.

누구에게나 구원자는 있다
J. D. 밴스가 2016년에 출간한 자서전 [힐빌리의 노래]를 2020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했다. 쇠락한 공업지대를 일컫는 러스트벨트 지역 가운데 하나인 오하이오 철강 도시에서 태어나 백인 빈민층의 삶을 살던 밴스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예일 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법조인이자 벤처 캐피털리스트, 또 저술가로 자수성가한 인물. 영화는 에이미 애덤스와 글렌 클로스가 각각 밴스의 어머니 배브 밴스와 할머니로 열연을 펼친 작품으로 더욱 화제가 되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예일 대학교 법대 졸업을 앞둔 밴스는 로펌 여름 인턴십에 지원해 면접을 치르던 중 고향에 있는 누나 린지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어머니가 헤로인 중독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10시간이 넘는 길을 달려 그들을 찾아간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사랑과 폭력을 함께 경험했다. 어머니 역시 어린 시절 어머니의 남자친구들에게 폭행을 당했는데, 이것이 정신적 유산으로 남아 자식에게 대물림된 것이다. 어머니는 유일한 방패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하마터면 같은 삶을 살 뻔한 밴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건 다름 아닌 그의 할머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학업을 등한시하던 그는 할머니의 단호하면서도 따뜻한 처사에 점점 마음을 연다. 그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이끈 한 사건이 있었다. 수학 시간에 그래픽 계산기가 필요한 그를 위해 할머니가 식료품 살 돈을 모두 털어 그것을 사준 것. 결국 그는 해병대에 지원하고, 예일 대학교 법대에 진학하면서 러스트벨트 지역 출신이라는 속박과 차별에서 벗어날 길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영화의 결말은 해피엔드다. J. D. 밴스는 현재 성공한 법조인으로 정치적으로도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며 주목받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되었고, 그의 어머니 역시 현재 6년 동안 약물에 손을 대지 않은 채 손주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영화 [힐빌리의 노래] 스틸 컷.

사실 이 모든 일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을 때 손을 내밀어준 구원자가 있기에 가능했다. 그의 구원자는 앞서 말한 것처럼 할머니였을까? 극 중으로 돌아가보자. 할머니는 끊임없이 밴스에게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엉망이지만) 그럼에도 네 엄마다”, “아직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가족이 전부다”, “내가 죽으면 누가 이 가족을 돌보겠느냐”. 할머니는 딸의 절망스러운 모습에도 가족이란 고리를 놓지 않았고, 그녀에게서 자식을 뺏는 것과 다름없음에도 밴스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모든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아마 J. D. 밴스의 구원자는 할머니라고 굳게 믿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할머니는 그저 밴스에게 기회를 줬을 뿐이라는 것이다. 손자가 진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손자의 앞길이 풀렸으면 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그를 지지했다. 처음에는 “당신이 뭔데 내 일에 상관하느냐”며 삐딱하게 굴던 밴스는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자신의 길을 고쳐나갔다. 여차하면 미국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빈민층 백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지만, 결국 그를 구원한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던 셈. J. D. 밴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불행한 어린 시절을 딛고 선 자신의 ‘성공 스토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 모두 각자 처한 상황과 환경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점, 누구에게나 ‘나’라는 구원자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 에디터 정송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책방 전경.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을 여행하는 법
적막함 속에서 작품을 관람하는 방탄소년단 김남준(RM)의 사진이 그룹 SNS 계정에 꾸준히 올라오며 팬클럽인 아미(ARMY)에게도 미술은 이제 음악과 더불어 또 하나의 익숙한 문화적 현장이 되었다. 정부의 문예 진흥정책과 시민들의 향유가 비례로 증진하며, 국공립 미술관들은 일반 관람자들과 더불어 김남준이 방문한 전시를 찾는 방탄소년단의 팬으로 북적거린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에 미술계 인사 모두가 긍정해온 것은 아니다. 가령 정준모 평론가는 대중의 관심은 환영하면서도 비판 없이 스타의 동선을 쫓으며 미학적인 견해 없이 관람하는 자세를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는 칼럼으로 공분을 남긴 바 있다. 팬덤 역시 미술관 측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때로 미술계가 지나친 홍보로 멤버들의 사적 일상에 지장을 준다고 우려를 표하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김남준이 기존의 유명인들처럼 미술을 상징 자본으로 포획하려 한다는 비판적인 시선도 공존하며, “한국 미술계가 김남준이 본 전시와 안 본 전시로 나뉜다”는 다소 선정적인 내용의 칼럼도 게재되며 전자의 비판적 시선과 결부된 공론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삶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치열한 사유의 과정을 공유하며 외로움과 자기 비하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준 이가 바로 김남준인 만큼 방탄소년단을 오랫동안 보아온 팬들에게는 그가 미술관을 찾는 모습이 익숙하다. 즉 이들은 김남준이 기존의 셀럽과는 다른 방식으로 미술관을 찾는 행위를 직시하고 이해한다. 보다 직설적으로 언급하자면 김남준이 다소 불필요한 논쟁에 휘말린 것은 그가 직접 미술관을 방문하며 실천한다는 데 있다. 즉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한 바와 같이 계급을 구분하는 일종의 문화적 기제로서 미술을 상징화하려는 기존의 유명인사들과 달리 김남준은 직접 두 발로 전시장을 꾹꾹 걸어 다니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기 때문에, 그만큼 미술계와 여타 분야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샀다. 말하자면 앞서 언급한 정준모 평론가의 글로 촉발된 논쟁은 오히려 김남준이 미술을 단순히 문화적 투자가치로서가 아닌 사유를 확장하는 기폭제로 삼으며 누구보다도 순수하게 접근한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시사한다. 절판된 도록이 재발간될 수 있도록 국립현대미술관에 후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김남준은 불운했던 근현대 미술가 한 명 한 명과 시대적으로 교감하며 대화를 나누고자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김남준은 미술 애호가를 넘어 삶의 형식에 대한 실존적 투쟁의 주체가 되어 그들 앞에 온전하게 발가벗고 선다.





지난해 가을 방탄소년단 김남준(RM)은 국립현대미술관재단을 통해 1억 원을 후원 기부했다.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그런 점에서 그가 미술과 조우하는 방식은 유명세로 손쉽게 화랑과 접촉해 작품을 구매하고 영향력을 가시화하는 여타 다른 유명인사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이는 방탄소년단이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과도 다른 궤도를 지닌다. 본업인 음악으로 시대적 성찰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행위와는 달리 그가 미술관을 방문하는 실질적인 기제는 철저히 개인적이며 고독한 자아와 대면 및 치유에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는 ‘방탄소년단의 세계화’라는 전례 없는 현상 속에서 본인이 어느 토대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미술관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자문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일 테다. 유독 삶의 생채기가 많은 이들이 방탄소년단의 음악으로부터 삶의 동력을 얻듯이, 아미 또한 김남준을 계기 삼아 미술관에서 조용히 사색에 빠지지 않는다고 단언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혹자는 김남준이 미술계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된 뒤에 우려할 만한 상황은 없는지 묻기도 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미술을 향유함에 있어서는 어떠한 주의 사항도 없다. 그 어느 영향력 있는 연예인의 팬덤이 미술관을 방문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미학적 관점’이란 본디 수시로 여러 사상가에 의해서 비판받고, 세대별로 교정되어가는 것이다. 수많은 사상가에게 미학적 성찰은 죽는 그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 여정임을 이해한다면, 어느 누가 일반 관람객에게 미술관에서 이러한 태도를 갖출 것을 강압할 수 있겠는가. 이들이 유의할 사항이란 고작 작품에 손을 대지 않는 기본적인 수칙 정도일 뿐이다. 물론 이는 어린아이 누구라도 지키는 사항이다. 즉 미술관을 여행하는 법에 정도(正道)란 없다.
- 미술비평가 문정현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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