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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26

진은숙이 그린 음악

작곡가 진은숙이 예술감독으로서 그리는 통영국제음악제의 미래.

1999년 윤이상 음악의 밤과 2000~2001년 통영현대음악제를 모태로 한 통영국제음악제는 2002년부터 매년 봄에 개최되고 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에게 친숙한 작품과 신선한 현대음악이 어우러진 프로그램 구성이 특징으로, 유망한 연주자와 작곡가를 발굴하고 현대 동서양 음악 문화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며 오늘날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제로 올라섰다.
지난 2022년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진은숙은 독일 함부르크 음악대학에서 조르지 리게티를 사사했고, 2004년에는 바이올린협주곡으로 그라베마이어상을 받으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이후 쇤베르크 음악상, 비후리 시벨리우스 음악상, 마리 호세 크라비스 음악상, 바흐 음악상, 레오니 소닝 음악상 그리고 지난 1월 ‘클래식 음악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수상하며 현존하는 최고 작곡가로 자리매김했다. 덕분에 세계 음악계의 이목이 더욱 집중된 2024 통영국제음악제(3월 29일~4월 7일)에서 예술감독 진은숙 그리고 작곡가 진은숙 모두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2024 통영국제음악제 개막 공연을 빛낸 비올리스트 앙투안 타메스티. 국제음악재단 / © 김성찬
“익숙함보다는 특별함을 선사하는 것이 저와 음악제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앞서가는 속도가 빠를수록 청중이 뒤따라오는 속도도 빨라지리라 믿습니다.”


1년에 서너 번 통영을 방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멋진 바다 풍경과 아름다운 연주에 작곡가로서 고민을 잠시 내려놓을 수도, 예술감독으로서 책임감이 파도처럼 밀려올 것도 같습니다. 자주 오고 싶은데 일정이 여의치 않습니다. 통영에서도 분주하게 지내다 보니 배도, 케이블카도 타보지 못했네요. 내년에는 좀 더 여유를 갖고 이 도시를 즐기려 합니다. 저는 주로 독일에 머물지만, 음악제 준비는 1년 내내 이어지니까요. 힘에 부치기는 해도 음악제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충분히 보상이 됩니다.
올해 음악제 주제는 ‘순간 속의 영원’입니다. 다분히 시적인데, 어떤 의미를 담았나요? 2022년 ‘다양성 속의 비전’, 2023년 ‘경계를 넘어’와는 조금 결이 다른 주제입니다. 음악제에서 연주되는 모든 곡 하나하나가 영원히 기억에 남을 순간이라는 의미를 담았죠. 음악은 기대에 부합하거나 예상을 벗어나기도 하고, 시간 감각을 초월한 경험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영원이 순간 속에 나타나 우리를 고양된 의식 상태로 이끌 수도 있고요.
예술감독 임기가 5년이니 절반 정도 항해한 셈입니다. 그간의 성과를 평가하면 어떤가요? 처음 목표를 향해 순항하고 있나요? ‘다양성’이라는 화두를 던지고자 했고, 그렇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클래식 본고장인 유럽과 한국은 위치가 다르잖아요. 한국이기에 다른 관점에서 음악을 다룰 수 있고, 우리가 그리는 음악의 미래는 그들의 미래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음악제에 김일구 명창의 판소리 ‘적벽가’를 무대에 올린 것처럼요. 또 한국은 다른 나라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디지털화되고 있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니 수석 베이시스트 매슈 맥도널드의 연주와 사운드·비주얼 아티스트 아라이 다쓰루의 3D 매핑이 상호작용하는 사이먼 제임스 필립스의 ‘스레드’, 작곡가 마르쿠스 슈미클러의 음악과 비주얼 아티스트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이 조화를 이루는 ‘리히터스 패턴스’ 등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멀티미디어 공연을 준비한 이유입니다.
새롭고 다양한 것을 추구하면서도 청중이 좋아하고 찾는 것 사이의 균형을 잡는 일이 중요하겠지요. 작곡가로서는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것을 원하는지가 최우선입니다. 하지만 예술감독으로서 프로그램을 구성할 때는 어느 정도 대중성을 고려하는 것이 사실이죠. 그러나 소통을 이유로 퀄리티를 낮추는 건 오히려 청중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이번 개막 공연에서 비올리스트 앙투안 타메스티가 앙코르 요청에 “바흐 혹은 힌데미트?”라고 묻자, 누군가 단숨에 “힌데미트!”를 외치더군요. 힌데미트가 낯선 분도 있겠지만, 익숙함보다는 특별함을 선사하는 것이 저와 음악제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매년 주제를 정해 연주자를 섭외하고 프로그램을 구성해 음악제를 완성하는 일은 하나의 곡을 세상에 내놓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체적 구조를 짜고 기승전결을 고려하는 과정은 작곡만큼 복잡합니다. 그래서 재미있기도 하고요. 덧붙여 작곡가는 다른 이의 작품을 들으며 끊임없이 정진해야 하는데, 음악제를 준비하며 많은 곡을 접하다 보니 공부가 됩니다.







디지털 기술 활용이 돋보이는 '스레드' 공연 모습.

한편으로 작곡가는 예술감독보다 좀 더 고독할 것 같습니다. 작곡은 온전히 혼자 해야 하니까요. 또 다른 점이 있다면, 음악제에선 훌륭한 작품만을 소개하죠. 제가 쓰는 음악은 그렇지 않다 보니 심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감독님은 만족스럽지 않은 과거의 곡을 과감히 폐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방금 작곡은 평생 공부가 필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고요. 완벽주의 성향이 지금의 감독님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힘이 빠지는 순간도 있을 텐데, 무엇에서 다시금 힘을 얻으시나요? 특별한 취미는 없어요. 음악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음악으로 풀죠. 바흐의 음악을 많이 듣는데, 그중에서도 푸가를 가장 좋아합니다. 작곡은 결국 무엇을 어떻게 조직하는지에 관한 문제인데, 그런 측면에서 바흐의 푸가는 모범 답안에 가깝습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해독제이자 평생을 함께해온 반려자랄까.
얼마 전 인터뷰에서 “음악은 매번 달라야 한다. 매번 새로운 것을 찾는다. 끝나면 과거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독님의 음악이 문학과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하고, 발표하는 곡마다 새로움이 느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다만 예술 거장의 작업을 살피면 자신만의 스타일이 뚜렷한 경우가 많은데, 스타일에 관한 감독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자기 언어가 명확하고, 어떤 곡을 쓰든 강력한 개성이 묻어나는 작곡가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유형의 작곡가는 아니에요. 달리 생각하면 아직 저만의 언어를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죠. 이를 찾는 과정에서 매번 다른 음악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곡을 쓸 때 일종의 색채감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에요. 특히 오케스트라 곡을 쓸 때 여러 악기가 낼 수 있는 다양한 색깔을 최대한 뽑아내려 하죠.
내년 5월 독일 함부르크에서 초연하는 작품을 쓰고 계시죠.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와 심리학자 카를 융의 관계에서 영감받은 파우스트적 분위기의 오페라라고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후 근 20년 만의 오페라 작품이라 세간의 관심이 모이는데, 진행 상황이 궁금합니다. 40% 정도 끝냈어요. 이야기를 구상하는 데 몇 년이 걸렸고, 이어 곡 작업을 하면서 대본도 함께 쓰는 중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는 상당히 다를 텐데, 텍스트가 많아 단번에 이해하기는 힘든 작품일 거예요. 초연 후 언젠가 다시 한번 관심을 갖고 봐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2월 <베를린 필 진은숙 에디션> 음반 세트가 권위 있는 클래식 음악 전문지 <디아파종(Diapason)> ‘이달의 추천 음반’으로 선정됐습니다. 그에 앞서 1월에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받으셨고요. 한데 흥미로운 건, 이렇게 훌륭한 결실을 볼 때마다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뉘앙스의 코멘트를 덧붙이시더군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수상 소식은 8월 말부터 알고 있었어요. 공식 발표 전 주변에 알리면 안 되니 대나무 숲이라도 있으면 달려가 외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웃음) 물론 기쁘지만, 상이 제 능력을 증명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작곡가는 곡으로 말하고 평가받아야 하니 말이죠.
하나의 곡이 세상에 나와도 당장은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다고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 작품이 오래 기억될지, 잊힐지는 시간만이 아니까요. 그렇다면 훗날 예술감독으로서, 작곡가로서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작곡가로서는 죽고 나서도 계속 연주될 작품을 남기고 싶어요. 예술감독으로서는 음악제가 더욱 발전하는 초석을 다진 이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통영국제음악제는 20여 년간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퀄리티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아요. 지금의 과제는 그 퀄리티를 오래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한 준비를 마치는 것이 남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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