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쯔핑, 정보 과잉 시대의 고찰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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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06

왕쯔핑, 정보 과잉 시대의 고찰

고전 미술과 이모티콘, 전통 유화와 포토샵 레이어를 조합하는 왕쯔핑.

왕쯔핑 작가 1995년 중국 선양에서 태어난 왕쯔핑은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RISD)과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공부했다. 2022년 페레스 프로젝트(Peres Projects) 서울에서 국내 첫 개인전 〈커다란 침묵(The Loudest Silence)〉을 열어 한국 관람객에게 이름을 알렸고, 최근 상하이 스와치 아트 피스 호텔(Swatch Art Peace Hotel)의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현재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화가인 왕쯔핑의 아버지는 중국 선양의 집에서 방 한 칸을 작업실 삼아 학생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곤 했다. “겨울이면 그 방에선 눈부시게 푸른빛이 새어 나왔어요. 가까이 다가가면 온통 연필과 유화물감 냄새로 가득했죠. 저에겐 무척 신비하면서도 친숙한 공간이었어요.” 이처럼 왕쯔핑은 자연스럽게 미술의 길을 걷게 됐고, 천부적 재능은 앞으로 나아갈 수많은 문을 열어주었다. 이후 왕쯔핑은 선양을 뒤로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나갔다. 대학교 3학년 시절, 2년 전 떠난 일본 여행 사진을 보던 왕쯔핑은 갑자기 낯선 기분에 휩싸여 “내가 도대체 거기서 뭘 한 거지?”라고 자문했다. “사진을 보면 제가 그곳에 다녀온 건 분명한데, 당시 감정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거죠.” 일상의 경험에 숨은 끝없는 블랙홀을 가만히 응시하다 뜻밖의 감정이 밀려와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해에 왕쯔핑은 여행 후 남은 기억을 조각조각 모아 캔버스 한 폭에 담아냈고, 과다한 정보에서 얻는 평균적이고 모호한 감정을 자신만의 소재로 발전시켰다. “마트에만 가도 시선을 훔치는 제품이 끝없이 진열돼 있고, 스마트폰을 볼 때도 끝없이 쓸어 넘기기 바쁘죠. 모든 정보에 평등하게 노출되다 보면, 결국 그날 밤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뭘 봤나 떠올릴 때 본 게 너무 많아 대부분 감정은 기억조차 나지 않아요.” 왕쯔핑의 작품에서 특별히 강조한 요소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작품을 마주한 관람객은 순간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다. 소재를 선택할 때도 고전 미술, 제품 패키지,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가져온 이모티콘과 포토샵 투명 레이어에 이르기까지 왕쯔핑은 의도적으로 동등한 수준의 정보를 강조한다. 과잉 정보를 한 차원에 쭉 펼쳐놓고 정보와 정보의 조합, 오버랩, 융합을 통해 사람들의 주의력을 앗아가고, 사물을 볼 때 드러나는 습관을 새롭게 조명한다.





〈Small Lights through Daybreak〉, 2022. Courtesy of Peres Projects

밝은 색채, 기억 속 흩어져 있는 정보를 감싼 형상, 예를 들면 딸기요구르트 포장지, 서양 고전 정물화의 그림자, 마스크를 쓴 사람들, 픽셀화된 닭다리 이미지, 전기가 통하는 콘센트 그리고 수도 없이 지나간 포토샵 레이어의 ‘지우개 흔적’까지 이 모든 게 예상을 뛰어넘어 조화를 이룬다. 왕쯔핑의 작품에서 모든 정보는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 그렇기에 그림이 더욱 돋보이고, 관람객도 중심이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작품에 담긴 시각언어를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시각언어는 생동하는 화면, 사람들이 정보를 취득하는 행위, 지금 같은 정보화 시대에 나타나는 심리적 양상을 보여준다. 왕쯔핑은 체계적 미술 교육을 받았고 방대한 정보를 흡수하며 성장했다. 이미 미술사적 관점으로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 스타일을 정의하지 못한다. 왕쯔핑이 자신의 창작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지목한 알베르트 욀렌(Albert Oehlen)도 분류하기 어려운 작가로, 그는 독일 신표현주의를 계승해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형태로 현시대를 이끄는 문화를 조명한 작품을 선보인다. 이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현대미술도 이에 상응하는 활기로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국면을 창조해야 한다. 현재 왕쯔핑은 2차원적 평면 요소를 3차원적 조각 형태로 바꿀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탐구하고 있다. “올해는 왠지 느낌이 좋아요. 창작 에너지(creative energy)가 넘치거든요”라며 자신감을 내비친 젊은 작가와 대화를 나눴다.





〈Graduation Photos〉, 2022. Courtesy of Peres Projects

하나의 작품에서 보여줄 정보는 어떻게 선택해 조합하세요?
저는 추상화를 그린다는 생각으로 구도를 잡아요. 각 요소에 담긴 정보 자체를 중시하기보다는 색상이나 선, 형상과 형상의 조화에 신경 쓰는 편입니다. 일단 작품에 손을 대면 처음에 생각한 구도를 빠르게 잡아요. 여긴 파란색 형상이 필요하겠다, 저긴 노란색이 좋겠다고 생각하죠.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를 적용할지는 작품을 그리는 과정에서 천천히 고민합니다.
작품 제목이 하나같이 재미있어요. 작명도 작품 활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나요?
사실 작품과 제목은 관련이 없어요. 평소에 괜찮은 제목이 떠오르면 일단 메모하죠. 예를 들면 형용사 두 개를 임의로 붙였을 때 느낌이 미묘하게 좋은 것을 모아뒀다가 전시에 내보낼 작품에 붙여요. 그래서 제 작품명은 작품 해석보다는 정보의 교란이나 작품 밖에서 파생한 텍스트 정보에 가깝습니다.
스스로 내향적 성격이라 했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 선양도 색채가 풍부한 느낌의 도시는 아니거든요. 그런 점은 작품에서 보이는 색채의 밀도와 사뭇 다른 것 같아요.
한겨울에 중국 북동부 둥베이 지역에 가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무는 생기 없이 앙상하고 집집마다 난방을 하느라 온통 스모그로 가득해요. 마치 주변이 재를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이죠. 그렇지만 온통 잿빛인 탓에 둥베이의 화려한 민속적 색채가 강렬하게 드러나기도 해요. 이런 대비가 저에게는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이런 게 제 작품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봐온 시각 정보인 건 확실해요.
최근 작품에서 새롭게 시도하는 게 있다면요?
개념을 한층 강화해 하나의 이미지가 인지적 한계점을 넘어서지 않는 수준에서 어디까지 변화할 수 있나 도전해보고 싶어요. 이를테면 주전자 이미지를 어느 수준까지 변형해야 사람들이 여전히 주전자로 인식할지 같은 거요.





오른쪽 〈Writing Your Name in My Palms〉, 2022. Courtesy of Peres Projects
왼쪽 〈Hidden Glass Candy〉, 2022. Courtesy of Peres Projects

청년 작가로서 협업할 갤러리 혹은 아트 프로젝트를 선택하는 기준이 있는지 궁금해요.
저는 정말 운이 좋은 편이라 졸업하자마자 한 갤러리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어요. 현재 페레스 프로젝트를 포함해 총 세 곳과 일하고 있죠. 저는 갤러리와 협업한 작가가 이후에 어디로 갔는지, 그들의 행적이 제가 기대하는 미래와 부합하는지 관심 있게 보는 편입니다.
어떤 미래를 기대하는데요?
막상 말하려니 부끄럽지만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가 되는 것을 꿈꿨어요. 언젠가 베니스에 놀러 갔다가 그라시 궁전(Palazzo Grassi)에서 열린 지그마어 폴케(Sigmar Polke) 개인전을 봤는데, 연식이 오래된 낡은 공간을 그만의 현대적 감각으로 장악한 것이 굉장히 인상 깊게 다가왔어요. 그걸 보고 언젠가 나도 여기서 개인전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죠. 페레스 프로젝트와 계약을 앞두고 갤러리에서 제 인생 목표가 뭐냐 물은 적이 있는데, 그때도 전 그라시 궁전에서 개인전을 열고 싶다고 했어요. 구체적 인생 목표를 말하자면 그래요.
거절한 프로젝트도 있나요?
많죠. 사실 제 작품의 색감이 밝고 튀는 편이라 상업 미술이나 트렌디 미술 같은 형식과 결합하기 쉬워요. 하지만 커리어 플랜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우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디서 작품 활동을 이어갈 계획인지 들려주세요.
아직 모르겠어요. 아마도 뉴욕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며 전시도 보고 친구들도 만날 것 같습니다. 선양에서 2년 정도 지낸 적이 있는데, 사실 굉장히 편하긴 했지만 사람이 이렇게 편하게만 살아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하이도 굉장히 생소한 환경인데, 이참에 제가 언제 어디서든 뿌리를 내리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지금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확신을 얻게 됐죠.(웃음)

 

에디터 백아영(summer@noblesse.com), 천위안(陈元)
청리(成黎)
사진 제공 페레스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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