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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7

예술로 생존하기

스포어 이니셔티브에서 대안적 삶의 가치를 만나다.

스포어 이니셔티브 강당. ©Hans-Christian Schink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베를린은 그만큼 폭넓고 자유로운 문화 표현으로 영감을 자극하는 도시다. 그중에서도 이주민 거주 비율이 비교적 높은 베를린 남부 노이쾰른은 독일의 재통일 이전에 서독에 속한 지역으로, 아직도 대안적 삶의 모습이 곳곳에서 배어난다. 올 초 이곳에 새로 문을 연 다학제 문화 기관 스포어 이니셔티브(Spore Initiative)에 다녀왔다. ‘스포어(spore)’란 ‘포자’를 뜻하는 단어로 단독 발아해 새 세대와 개체를 형성하는 생명체를 이르는데, 무성생식을 하는 포자는 발아에 적합한 환경을 만나야 한다. 이처럼 그동안 멕시코 유카탄에서 출발해 마야 문화를 바탕으로 활동하는 작가와 전문가, 이니셔티브가 함께 영토 방어, 밀파(milpa, 생태계를 해치지 않는 멕시코의 전통 농업 방식), 양봉, 전통 의학 등을 중심으로 폭넓은 대화와 워크숍을 진행한 스포어 이니셔티브가 베를린에 도착해 예술과 함께 발아하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스포어 이니셔티브의 야외 텃밭. © Misol Lee
아래 토양 보살피기 워크숍. © Spore Initiative

스포어 이니셔티브에 다다라 커뮤니티 정원을 지나면 초록이 무성한 카페 공간이 행인의 발길을 이끈다. 테라스처럼 개방된 카페 공간으로 걸음을 내디디면 시선은 자연스레 로비로 연결되는데, 정면에 보이는 쇼윈도에서 작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로비 양쪽에는 강연과 상영회 등을 선보이는 다목적 강당이 있고, 통유리 너머 내다보이는 건물 뒤쪽에는 주립 공원으로 이어지는 너른 텃밭과 녹지가 펼쳐진다.
위층으로 올라가면 좀 더 넓은 메인 전시 공간 두 개가 나타난다. 전시장, 강당, 카페, 스튜디오, 도서관과 야외 정원 등 대중에게 개방하는 공간에서는 정원사, 요리사, 치유사, 문화 활동가와 작가, 교육자, 과학자 등이 함께 모여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간다. 별도로 직원이 상주하는 공간도 있는 다목적 건축물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AFF 건축사무소(AFF Architekten)가 설계했다. 스포어 이니셔티브의 주축이 되는 재단은 문화 예술에 관한 비영리 활동을 목적으로 출발, 해외의 여러 지점과 협력해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한스 쇠플린(Hans Schöpflin)은 2001년부터 다양성을 포용하는 민주적 사회를 추구하며 비판적 의식을 고취하고자 쇠플린 재단(Schöpflin Foundation)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오스발도 산체스(Osvaldo Sánchez)가 스포어 이니셔티브 설립에 함께했으며, 자문위원이자 역사학자인 리슬 쇠플린(Lisl Schöpflin)은 미국 자선단체 솔리데어 네트워크(Solidaire Network)와 멕시코 문화 기관 카사 갈리나(Casa Gallina)에서도 이사로 활동하며 식민지 시대 안데스산맥 원주민의 역사와 문화 연구, 저술에 주력한다. 스포어 이니셔티브의 디렉터는 창립 멤버 중 한 명인 안토니아 알람피(Antonia Alampi)가 맡고 있다. 핵심 멤버들의 경력에서도 엿볼 수 있듯, 스포어 이니셔티브는 중남미 대륙의 문화를 하나의 축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건물의 옥상 테라스. © AFF Foto, TJARK SPILLE

특히 이곳의 주요 활동은 ‘생태계 보호’를 자극하고 수행하는 것이다. 문화 기관으로서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멀리 떨어진 공동체와 기관, 사람들의 대화를 이끌어내고, 공동의 토대를 튼튼히 하고자 노력하며 지난 4월부터 본격적으로 전시 프로그램을 대중에게 선보였다. 먼저 2층 오른쪽에 자리한 전시장에는 마야문명이 토종벌과 유대를 형성한 양태를 다양한 모습으로 전시 중이다. 양봉 지식은 물론, 생태계의 보호자로서 숭배를 받은 이 섬세한 생명체를 향한 시, 표의문자, 영상과 사운드 작업을 확인할 수 있다. 학생들의 사전 워크숍 결과물도 함께 자리한다.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이해하고 공존하는지 몸소 느낄 수 있는 공간은 유소년은 물론 성인에게도 창의적 통찰을 제공한다. 맞은편 전시장에서는 [숙 킨(Xook K’iin)]전이 올해 12월 31일까지 이어진다. ‘숙 킨’이란 유카탄 마야어로 ‘태양을 읽다’라는 의미다. 상징적 문구에서 유추할 수 있듯 전시 제목은 허리케인이나 가뭄, 비, 바람 같은 날씨 변화와 기상 현상을 예측하고자 마야인들이 습득하고 축적한 지식의 한 형태를 이르는 말이다. 전시는 환경에 관한 경험과 일기를 기반으로, 특정 식물과 곤충의 양태를 관찰하고 해석한다. 마야 문화와 언어에 그대로 녹아든 ‘숙 킨’을 보여주는 이 전시에는 시각예술가와 시인, 장인, 현지 거주민과 연구원, 초등학생,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참여해 설치, 사운드, 평면 작품을 대거 선보인다.





스포어 이니셔티브 도서관. ©Spore Initiative

인간에 의한 급속한 환경 변화에 제때 적응할 수 있을지 불안해지는 오늘날, 자연현상과 삶이 함께 호흡하고 공명하는 작품의 전언이 근원적 안정감을 준다. 마치 귀중한 지혜를 전하는 낡은 책을 창고 깊숙한 곳에서 찾아낸 것처럼 인류가 오래전에 깨친 지식은 반갑고도 새삼스럽다. 전시와 함께 정기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도 상영한다. 영화감독 아드리아나 오테로 푸에르토(Adriana Otero Puerto)가 큐레이팅한 세 편의 멕시코 영화를 9월 초까지 매주 상영하는데, 토지 수탈이나 토양, 서식지 오염에 따른 투쟁에 직면한 농민의 삶을 통해 지구 환경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베를린에 본격적으로 문을 연 후 여름까지 불과 한 계절 사이에 스포어 이니셔티브는 더 많은 방문객과 참여자를 끌어모으며 생기를 더해가고 있다. 노이쾰른에서 막 발아하기 시작한 이곳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다양한 분야의 학자와 직업인이 상호작용하며 만들어가는 예술, 그리고 그 자체로 예술이 된 생명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에디터 백아영
이미솔(미술 저널리스트)
사진 제공 스포어 이니셔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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