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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27

우리 여기서 다시 만나기를

제주도 박서보 미술관을 기다리며

 City Now   In Jeju



박서보미술관 조감도. © Fernando Menis

“미술관에 온 모든 사람이 마음속 응어리를 치유하길 바랍니다. 내 그림이 대중을 치유하길 원해요. 그게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목적입니다. 나는 내 생각을 잔뜩 토해내서 이미지 폭력을 가하는 예술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박서보 작가는 지난 3월 제주 서귀포시 호근동에 있는 JW 메리어트 제주 리조트 & 스파에서 열린 박서보미술관 기공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술을 통한 치유와 힐링. 어쩌면 뻔한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뻔한 말이 전혀 뻔하게 들리지 않았다. 예술은 진짜 그런 힘이 있으니까. 그리고 90세가 넘어서도 작품 활동에 매진하는, 자신이 폐암 3기라는 사실을 담담히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예술의 힘을 전파하는 고령의 예술가 작품에는 정말로 마음의 응어리를 치유할 수 있는 힘과 울림이 담겨 있다.
지난 3월 14일 착공한 박서보미술관은 내년 여름 JW 메리어트 제주 부지에 총건축면적 1만1571㎡(전시관 900㎡), 지하 2층, 지상 1층 규모로 들어선다. 설계는 2015년 폴란드 CKK 요르단키-문화 컨벤션 센터(CKK Jordanki-Culture and Congress Centre)로 이름을 알린 스페인 건축가 페르난도 메니스(Fernando Menis)가 맡았다. 안토니오 가우디가 수학하고 교수로 재직한 것으로 유명한 바르셀로나 건축학교(Escuela Tecnica Superior de Arquitectura de Barcelona)에서 공부한 그는 엘탕케 정원(El Tanque Garden, ETSAB), 스위스 뷔르헨 광장(Burchen Square) 등을 설계했으며 베니스 비엔날레, 뉴욕 현대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화려한 이력도 눈길을 끌지만 그가 스페인령 카나리아제도의 가장 큰 섬 테네리페(Tenerife) 출신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제주도처럼 테네리페섬도 화산 폭발로 탄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고향과 닮은 제주 고유의 특성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그는 제주의 자연을 대표하는 요소인 빛, 바람, 물을 끌어들여 미술관 건축에 자연스럽게 반영하고자 한다. 평소 자연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박서보 작가의 예술철학과 ‘섬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자연친화적 건축가 페르난도 메니스의 건축 세계가 합치를 이루는 지점이다. 페르난도 메니스는 기자간담회에서 “작가를 위해 평생 존재할 수 있는 ‘미술관 집’을 짓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으며 두 거장은 컨셉을 세우는 과정부터 설계,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꾸준히 소통하고 교류하고 있다.
미술관이 들어설 부지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범섬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서귀포시 호근동 JW 메리어트 제주 안에 자리한다. 리조트 안 올레 7코스와 이어지는 산책로를 거닐다 보면 세계적 예술가의 작품이 선물처럼 따라온다. 박서보미술관을 짓는 지금도 이미 리조트에는 다양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리조트 외부 산책로에선 영롱한 빛을 뽐내는 우고 론디노네의 조각을 마주할 수 있고, 실내 수영장 안에는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위트 넘치는 작품이 숨어 있다. 리조트 안 작품과 내년에 오픈할 박서보미술관은 리조트 투숙객이 아니어도 제주를 찾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JW 메리어트 제주 리조트 & 스파 전경. © JW Marriot Jeju Resort & Spa





제주에 들어설 박서보미술관의 지하 2층 전시실을 구현한 모습. © Fernando Menis

한편 박서보미술관 건축물은 자연광이 지하 전시실까지 닿을 수 있도록 ‘성큰(sunken)’ 구조를 도입할 예정이다. 이는 현대 도시 디자인에 자주 쓰는 공법으로, 지하 혹은 지하로 통하는 지점에 자연광을 유도하고자 만든 공간을 말한다. 지하 2층에 자리할 전시실을 자연의 빛을 받아들이는 구조로 설계해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 박서보 작가의 작품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유도할 계획이다. 자연광을 활용하는 만큼 그림자도 건축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기대된다. 미술관 내·외부 경관이 어우러지도록 제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연 재료를 건축 마감재로 선택했다. 여기에 토착 식물을 심어 제주의 자연을 빼닮은 외부 정원도 조성한다. 페르난도 메니스가 직접 개발, 그동안 스페인 테네리페섬의 마그마 아르테 & 콩그레소스(Magma Arte & Congresos) 등을 건축할 때 사용한 피카도(picado) 공법으로 미술관 벽체를 마감할 계획이다. 피카도 공법은 콘크리트와 깨진 벽돌을 섞어 만든 새로운 유형의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벽돌과 콘크리트를 원하는 강도와 질감에 따라 혼합해 기존 콘크리트보다 내구성이 좋다. 또 재활용 자재를 사용하는 공법이니만큼 지속 가능성이 뛰어나다.
이렇게 박서보 작가의 예술철학처럼 자연친화적 면모를 갖춘 박서보미술관은 그의 작품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그는 “동시대에 활동하는 좋은 작가들의 개인전을 열거나 작품을 전시하며 한 시대의 연대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라고 전했다. 개관전에서 선보일 작품을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는 “그걸 미리 말하면 재미없죠. 그건 맥주 캔을 따놓고 마시지 않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라는 위트 있는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다시 기자간담회 현장을 회상해본다. 그날 기공식에서 박서보 작가는 자신의 입으로 전하는 것이 예의라며 폐암 3기 발병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 앞서 작가의 인스타그램에서 밝힌 사실이긴 하나 그에게 직접 듣는 이야기는 무게부터 달랐다. “처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이걸 다 어쩌라고 나에게 이런 형벌을 내리는지 원망했죠. 하지만 나는 체념을 아주 잘합니다. 단념하는 데 아주 뛰어난 사람입니다. 처음 2~3일은 흔들렸지만 지금은 다 잊었습니다”라고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내년 여름 개관식에서 모두를 꼭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라는 그의 말대로 딱 1년 후 우리 모두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기를, 그의 이름을 딴 첫 미술관의 개관을 축하하는 자리에 다 함께하기를 바란다.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

 

에디터 백아영(summer@noblesse.com)
사진 제공 기지재단, 오운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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