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성장통 - 노블레스닷컴

Latest News

    CITY NOW
  • 2022-12-15

박물관의 성장통

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반발감에 대처하는 박물관의 변화 .

영국박물관이 소장한 베닌 브론즈. Courtesy of the British Museum

다국적 예술가의 문화 헤리티지와 역사를 조명하는 올해 하반기 런던 예술계의 행보는 2020년에 재점화된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BLM)’ 운동의 영향력이 영국 예술계에서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거 제국주의 역사를 반성하는 흐름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8월 런던 포레스트힐에 있는 호니먼 박물관(Horniman Museum)은 이를 더욱 가속화할 역사적 결정을 발표했다. 박물관이 소장한 베닌 브론즈(Benin Bronze) 72점이 ‘약탈’ 문화재임을 인정하고 이를 나이지리아에 반환하기로 공표한 것.
호니먼 박물관이 반환을 결정한 베닌 브론즈는 과거 나이지리아 서남부 베닌왕국(Kingdom of Benin)의 왕실 청동 조각으로 유럽의 제국주의 역사를 현현하는 대표적 약탈 문화재다. 1897년 영국의 베닌왕국 침략을 기점으로 영국과 독일을 필두로 한 유럽 열강의 표적이 됐으며 높은 심미적 가치로 미국 컬렉터까지 매료한 탓(?)에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는 고난을 겪은 비운의 문화재다. 현재 160개가 넘는 기관과 무수한 개인 컬렉터가 베닌 브론즈를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박물관이 밀집한 런던은 그만큼 많은 베닌 브론즈를 보유한 도시로 꼽힌다.





호니먼 박물관 전경. Courtesy of Horniman Museums and Gardens
아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전경. Courtesy of Victoria and Albert Museum

사실 영국의 이번 반환 결정이 처음은 아니다. 나이지리아 정부의 공식 요청으로 지난해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지저스 칼리지(University of Cambridge, Jesus College)와 애버딘 대학교(Aberdeen University)가 베닌 브론즈를 돌려준 전례가 있다. 그러나 각각 1점씩만 반환한 앞선 사례와 달리 호니먼 박물관의 결정은 역사상 전무한 대규모 컬렉션급 반환이라는 점에서 기념비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영국 언론은 이를 비중 있게 보도하며 다른 기관의 행보에도 관심을 보였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호니먼 박물관이 이른바 ‘장물 박물관’으로 불리는 영국 박물관들의 고질적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에 결정적 틈을 만든 셈으로, 다른 곳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해왔음이 드러났다. 언론은 또한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도 약탈 문화재로 추정되는 아샨티제국(Ashanti Empire, 현 가나)의 금제 문화재 반환을 논의 중이었다고 보도했다.
불과 2010년대에만 해도 유독 ‘반환 불가’라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 영국이 최근 태도를 바꾼 배경에는 바로 BLM 운동의 여파가 자리한다. 이를 기점으로 영국 내에서제국주의 역사와 관련 있는 영국 문화기관에 가하는 정치적·도덕적 압력이 강화됐다. 세계적 탈식민주의 흐름 역시 영국의 태도 전환을 추동한 주요 요인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 7월 독일 박물관이 발표한 1130점이 넘는 베닌 브론즈의 소유권 이전 약속과 미국 박물관의 약탈 문화재 반환 검토 소식은 영국이 느끼는 압력의 수위를 높이기에 충분했다.
나이지리아의 국가 위상 제고와 노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2021년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GDP를 기록한 나이지리아는 1970년대 이후 연방정보문화부와 국립박물관기념물위원회(NCMM)를 구심점으로 약탈 문화재 환수 프로젝트와 환수 후 관리 계획을 체계적으로 진척했다. 최근 괄목할 만한 약탈 문화재 반환 결정이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유 역시 나이지리아가 비교적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을 가진 피해자라는 씁쓸한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박물관의 웅장한 로비. Courtesy of the British Museum
아래 영국박물관이 소장한 엘긴 마블. Courtesy of the British Museum

이런 변화의 바람이 불면서 런던의 심장부에 자리잡은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는 어느 때보다 많은 이목이 집중된다. 대영제국 박물관으로 추앙받는 동시에 ‘대약탈 박물관(The Brutish Museum)’이라는 오명을 쓴 영국박물관의 수장고에는 여전히 900점이 넘는 베닌 브론즈와 무수한 약탈 문화재가 잠들어 있다. 그러나 2021년 나이지리아 연방정보문화부의 베닌 브론즈 공식 환수 요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문화재 반환 요구에도 영국박물관은 아직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요청 국가의 문화재 온라인 데이터베이스 개발과 리서치에 협력하겠다는 핵심을 비껴간 계획으로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을 뿐.
호니먼 박물관의 발표 이후 영국박물관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영국박물관의 소극적인 태도를 오롯이 박물관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영국 소재 박물관은 1963영국박물관법(British Museum Act 1963)과 1983국가문화재법(National Heritage Act 1983)에 따라 ‘아주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소장품의 자의적 처분이나 이전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박물관이 결정적 선례를 만들면 영국 내 다른 박물관도 강한 반환 압력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영국박물관의 입장 표명을 어렵게 하는 요소 중 하나다. 이에 당분간 영국박물관의 결단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대세는 영국박물관의 입장과는 반대 방향으로 기우는 듯하다. 새로운 법이 등장해 영국 내 박물관을 향한 문화재 반환 요청은 앞으로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올해 하반기에 발효 예정인 2022자선단체법(The Charities Act 2022)이 시행되면 (비록 ‘낮은 가치’의 소장품에 한해서지만) 영국 내 박물관은 컬렉션 이전과 처분의 자의적 결정권을 갖게 된다. 더불어 박물관 측에서 도덕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중요도가 높은 소장품에 대해서도 영국 자선위원회(The Charity Commission)에 반환을 위한 진정서를 제출할 수 있다. 즉 문화재 반환에 좀 더 긍정적인 법률적 근거가 생기는 동시에 이 문제 해결을 위한 각 박물관의 태도와 도덕적 의지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수혜로 기틀을 마련한 런던의 많은 문화기관이 새로운 사회 환경에 따라 이제는 변화의 길목에 서 있다. 2020년대에 도덕적 요구에 발맞춰 과연 이들이 얼마나 성숙해질 수 있을지, 고민과 성장통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에디터 백아영(summer@noblesse.com)
전민교(프리랜서)

관련 기사

페이지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