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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25

달콤한 전도사

디저트는 섬세한 터치를 필요로 하는 분야다. 세밀한 감성을 녹여내는 페이스트리 신에서 여성만의 가치관과 에너지, 미감을 선보이며 활약 중인 한국인 셰프들.

플랫아이언. ⓒ Dan ahn
무스 케이크 리제. ⓒ Dan ahn
옥수수를 형상화한 콘. ⓒ Dan ahn
베이비 바나나. ⓒ Dan ahn
리제 외관. ⓒ Dan ahn
이은지 셰프.


뉴욕에서 꽃피운 맛있는 예술 작품
다국적 문화가 공존하는 뉴욕 페이스트리 신에서 최근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한국인 셰프가 있다. 지난 6월, 뉴욕 메디슨 스퀘어 파크 근처에 오픈해 단숨에 힙 플레이스로 떠오른 베이커리 부티크 리제(Lysee) 이은지 오너 셰프다.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외에서 일찌감치 전도유망한 셰프로 인정받은 그녀. 2017년에 최고 페이스트리 셰프를 뽑는 프랑스의 TV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해 비유럽인 최초로 준우승을 거머쥐었고, 뉴욕 정식(Jungsik)에서 일하며 선보인 ‘베이비 바나나’로 2019년 미국 전문 매거진 <스타셰프(StarChefs)>로부터 라이징 스타로 선정되었다.
이은지 셰프가 디저트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은 열여덟 살 때, 파리로 유학을 떠나면서부터다. 프랑스 국립 제과 학교 INBP에서 제빵을, 에콜 페랑디에서 제과를 공부한 그녀는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 즈 키친 갤러리를 거쳐 르 뫼리스 호텔에서 세계적 페이스트리 셰프 세드리크 그롤레와 함께 일하며 페이스트리 기술과 노하우를 습득했다. “파리에서 일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지만, 마음 한편에는 한국적 식재료를 사용해 우리 정서와 느낌을 표현한 디저트를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좀 더 다양한 디저트를 만들고 싶은 열망에 뉴욕 정식의 이그제큐티브 페이스트리 셰프로 자리를 옮겼다. 이은지 셰프의 영입으로 뉴욕 정식은 디저트 마니아의 성지로 입소문이 났다. 디저트 테이스팅 코스 메뉴를 선보이는가 하면 그녀가 개발한 ‘베이비 바나나’는 뉴욕에서 꼭 먹어봐야 할 디저트로 등극했다.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녀는 리제를 통해 본격적으로 자신의 디저트 세계를 펼쳐 보인다.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고, 뭔가를 만들고 창조하는 걸 즐겼어요. 페이스트리 셰프라는 직업에 빠져든 이유도 먹을 수 있는 예술 작품을 만드는 아티스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자신의 이름인 ‘Lee’에 박물관을 뜻하는 ‘Musee’를 결합해 ‘이은지의 페이스트리 박물관’을 표방한 이곳에서는 그녀가 고심해 만든 ‘맛있는 예술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케이크, 빵, 구움 과자 등 20여 가지 디저트 중 눈여겨볼 메뉴는 ‘콘(Corn)’. 콘 무스와 콘 크림, 사블레, 구운 콘 크림을 이용해 ‘진짜’ 옥수수 같은 형태를 구현했다. 알갱이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크림을 일일이 짜서 얹고 옥수수잎을 초콜릿으로 하나하나 만드는데, 디저트를 완성하는 데 3일이 걸릴 정도로 엄청난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 외에도 기와에 착안한 로고를 표현한 무스 케이크 ‘리제’, 프랑스 전통 디저트 생토노레를 재해석한 ‘플랫아이언’ 등은 정교한 기술과 풍부한 맛, 감각적 비주얼로 뉴요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리제를 통해 해보고 싶은 게 아주 많아요. 디저트 테이스팅 프로그램이나 셰프와의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고 싶고, 궁극적으로 서울과 파리에도 리제를 선보이고 싶습니다.”





루바브 젤리, 이천 쌀 푸딩.
가을 곡식, 커피 된장.
달걀 초콜릿.
김나래 셰프.
레스토랑 퓌르 내부.
레스토랑 퓌르 내부.


파리에서 펼치는 마법 같은 디저트
“열여섯 살 때부터 제과를 시작했어요. 배울수록 새롭고, 제 세계를 무궁무진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었죠. 그리고 자연스레 페이스트리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어요.” 현재 파크 하얏트 파리 방돔(Vendome)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 퓌르(Pur’)에 근무하며 활발히 활동하는 김나래 페이스트리 셰프의 말이다. 그녀는 세계조리사회연맹(WACS)에서 2년마다 개최하는 ‘Global Pastry Chefs Challenge’의 한국인 최초 수상자이자 다양한 국내외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을 자랑한다. 이렇게 검증된 실력을 바탕으로 요즘은 현지의 인기 있는 가스트로 매거진 <튀리에(Thuries)>와 작업하는가 하면, 10월에는 글로벌 초콜릿 전시회 <살롱 뒤 쇼콜라(Salon du Chocolat)>에서 페이스트리 쇼를 시연한다.
페이스트리 셰프로 우뚝 서기까지 그녀의 여정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했다. “대학교 해외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괌 하얏트 리젠시에서 처음 근무했어요. 이후 그랜드 하얏트 서울, 파크 하얏트 사이공을 거쳐 파리에 왔죠.” 해외 여러 도시를 다니며 언어와 문화의 장벽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부당함도 많이 겪었을 터. 하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섬세한 작업, 즉 테크닉을 살려 지금의 자리에 올라섰다. 파리에 위치한 최고급 호텔 슈발 블랑(Cheval Blanc), 세계적 셰프 야니크 알레노(Yannick Alleno)가 이끄는 그룹 르두아앵 메종(ledoyen maison) 등 유명한 레스토랑을 거쳐 현재 퓌르에 합류하게 된 것. 퓌르를 이끄는 장 프랑수아 루케트(Jean-Francois Rouquette) 셰프는 2016년 베트남 행사에서 김나래 셰프를 처음 만나 그녀를 눈여겨보았고, 그때의 인연이 레스토랑 퓌르로 이어졌다. 그녀가 이곳에서 처음 선보인 달걀 초콜릿은 현지 프레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프랭탕(Printemps) 백화점과 협업해 팝업을 열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방돔 지역에는 귀금속 보석상이 밀집해 있어 보물이라는 컨셉을 디저트에 녹여냈어요. 4주에 걸쳐 팀원들이 함께 수작업으로 보석을 형상화한 설탕 결정을 만들었고, 보석을 콕콕 박은 듯한 달걀 초콜릿을 완성했죠.” 해외를 두루 다니며 다양한 문화를 접한 덕에 그녀는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고 그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담아 디저트를 만든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녹이거나 한국적 식재료를 사용하는 점도 눈에 띈다. “한국에서 디저트로 과일을 주로 먹은 탓인지 디저트에 과일을 많이 활용해요. 어린 시절 맛본 기억을 더듬으며 저만의 디저트를 창조하고 있어요.” 이천 쌀로 만든 푸딩에 루바브 혹은 산딸기를 조합하고, 된장을 캐러멜화해 아이스크림을 만드는가 하면, 보리·옥수수를 이용해 가을 디저트를 선보이기도 한다. “각 나라의 스타일을 배우는 것이 즐겁고 신선해요. 앞으로 행선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하루하루 도전하는 자세로 임하면 좋은 기회가 생겨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소라빵에서 영감을 얻은 흑소라 밀푀유.
가리비 밀푀유.
굴을 본떠 만든 오이스터 밀푀유.
멜론 콩포트를 수비드해 만든 멜론 디저트.
이은아 셰프.


달콤함을 나누는 기쁨
손재주가 뛰어난 한 소녀가 있었다. 네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초등학생 때는 직접 떡볶이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눠준 아이.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데 능통했던 그녀는 조소과에 진학해 순수 미술을 전공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막상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고, 돌연 런던 르코르동 블루 제빵·제과 과정에 입학해 디저트 분야에 발을 들였다. “제게 조소와 페이스트리는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차이죠. 원래 미식에 관심이 많았고,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했기에 망설임 없이 유학을 떠날 수 있었어요. 제가 만든 디저트를 매개로 사람들이 함께 나눠 먹으며 행복을 느끼는 것에 매료되기도 했고요.” 새로운 도전을 통해 비로소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만난 그녀는 현재 제과 전문 아카데미이자 팝업 스토어 운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우나스(Unas) 이은아 총괄 페이스트리 셰프다.
그녀의 디저트 여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귀국 후 들어간 그랜드 하얏트 인천 디저트 파트에서는 남성 위주의 문화와 엄격한 위계질서 때문에 부침을 겪었다. “조직 문화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자유롭게 디저트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에 다니며 메뉴를 연구·개발하고 교육하는 일이 제게 더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죠.” 이후 마망갸또에서 디저트 제작 및 교육을 동시에 진행하던 그녀는 2016년 디저트 카페 우나스를 오픈했다.
초창기 우나스는 긴 줄을 서서 기다려야 디저트를 맛볼 수 있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 아보카도, 굴, 단호박 같은 식재료를 본떠 만든 조형적 디저트 덕분. “마트에서 아보카도를 보고 디저트로 만들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과육은 아보카도 무스와 레몬 치즈 케이크로, 씨는 초콜릿에 망고와 유자 젤리를 넣어 만들었죠.” 이 제품이 SNS를 통해 널리 알려지고 화제를 모으며 우나스는 조형적 디저트를 맛볼 수 있는 독창적 디저트 숍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2019년 임신과 함께 더 이상 매장을 운영할 수 없게 되자 우나스를 제과·제빵 클래스를 위한 아카데미로 운영하는 대신 비정기적으로 팝업 스토어를 열어 자신만의 디저트를 선보이는 공간으로 바꾸었다. 원데이 클래스보다 카페 창업을 위한 전문가 과정 위주 클래스를 진행하는데,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팝업 스토어는 오픈과 동시에 예약이 마감될 정도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파리브레스트·바닐라 타르트·단호박 파운드케이크 등 전통 디저트도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가리비·소라·멜론 같은 식재료를 본떠 만든 개성 있는 디저트를 개발한다. “식재료를 똑같이 모사해 예술 작품을 만들면 오히려 쉬울 거예요. 하지만 저는 페이스트리 셰프잖아요. 리얼리티와 매장에서 판매할 제품, 그 중간점을 찾아야죠. 생산성도 고려해야 하고요.” 그녀의 시그너처 중 하나인 굴의 경우 페이스트리로 만든 껍데기 위에 흑임자 페이스트와 완두콩 앙글레즈 소스를 더한 뒤 가나슈 몽테 크림으로 굴을 표현해 올린다. 설탕을 최소화하되 원재료나 고품질 초콜릿에 든 천연 당분을 활용해 최적의 단맛을 이끌어내는데, 달지 않아 마지막 조각을 먹을 때까지 입안이 텁텁하지 않다. “조형적 디저트를 만드는 일도 계속해나갈 예정이지만, 비주얼에만 치중하지는 않을 거예요. 우나스만의 방식으로 맛과 풍미를 살린 전통 디저트를 선보이는 것은 물론 호두과자나 붕어빵처럼 대중이 쉽게 접하고 좋아할 수 있는, 클래식 디저트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설탕 공예로 만든 레몬.
소나 내부.
성현아 셰프.
샴페인 슈가볼.
베리 블러썸.


정성으로 탄생한 작품 한 접시
요즘은 맛있는 디저트를 맛보기 위해서라면 먼 거리를 찾아가는 것도, 긴 대기 줄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디저트 전성시대. 하지만 성현아 셰프가 2013년 소나(Sona)를 오픈할 때만 해도 디저트에 대한 관심은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더구나 플레이티드 디저트는 생소한 영역이었다. 이후 디저트에 대한 인식과 SNS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점차 소나의 디저트가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샴페인 슈가볼’은 비주얼도 예쁘고 숟가락으로 톡 깨서 먹는 재미가 있어 인기를 얻는 데 한몫했죠. 슈가볼 덕분에 소나를 방문하는 분도 많고요. 오픈 초기부터 시작한 메뉴로 원래는 딸기를 활용했는데, 워낙 인기가 좋아 시즌마다 제철 과일로 조금씩 구성을 바꾸고 있어요.” 소나의 시그너처가 된 이 디저트는 치즈 케이크를 포슬포슬한 눈 가루처럼 만든 ‘치즈 케이크 스노우’ 위에 각종 재료를 머금은 투명하고 얇은 구 모양 설탕을 올린 형태. 슈가볼을 숟가락으로 톡 깨면 식용 꽃, 부드러운 샴페인 폼, 체리와 자두가 채워져 있다. 너무 달지 않으면서 다양한 식감과 맛이 켜켜이 쌓여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슈가볼은 성현아 셰프의 디저트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플레이티드 디저트 하나를 만들기 위해선 오랜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해요. 근사한 요리 한 접시와 같으니까요. 온도와 식감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에요.” 레몬 폼과 무스를 채운 레몬 모양 슈가 프레임 옆에 치즈 무스, 일곱 가지 허브와 쇼트브레드 쿠키를 꽂은 레몬 디저트, 형형색색의 재료가 모인 베리 블러썸 등 예술 작품처럼 보이는 그녀의 디저트는 미국 유학 시절 경험이 바탕이 됐다. 성현아 셰프는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는 중에도 베이킹에 대한 열망과 비전이 늘 마음 한쪽에 남아 있었고, 이를 이루기 위해 30대 초반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 CIA로 유학길에 오른 뒤 현실은 디저트처럼 달콤하지만은 않았으나, 졸업 전부터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조엘 로부숑(Joёl Robuchon) 밑에서 인턴을 지내며 학업을 마치는 대로 합류해달라는 제안을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졸업 후 조엘 로부숑 팀에서 파인다이닝 디저트를 만들던 그녀는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익숙지 않던 플레이티드 디저트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개하고 싶었다. 그렇게 카페 소나에서 아름다운 디저트를 선보이기 시작한 지 어느덧 10년을 바라보게 된 것.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늘 고민해요. 체력이 많이 소모되는 일인 만큼 여성에게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따르지만, 디저트의 매력에 푹 빠져 이 자리까지 왔어요. 예전엔 나만의 독특한 디저트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는데, 이제는 언제나 사랑받는 디저트를 만들고 싶어요. 50대, 60대까지요.”

 

에디터 문지영(jymoon@noblesse.com),김혜원(haewon@noblesse.com)
사진 양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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